기록은 무한





그녀의 이름은 전혜린.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집 밖으로 한 번 나가본 적 없는 사람. 어느 날 훌쩍 독일 뮌헨으로 공부를 한다며 떠나, 그 곳에서 정신의 자유를 만끽했던 어느 한 사람. 주말이나 방학 때면 어김없이 학우들과 함께 그리스로, 이태리로 여행을 다니며 즐기길 마다하지 않고, 도시의 헌책방과 도서관에 들러 정신의 자양분이 될 글귀들을 읽곤 했던 그녀는 말. 얘기를 하고 있었다.

 

작년 연말의 나는 자전거를 타고 근처 헌책방을 찾은 일이 있다. 그 속에서 수많은 백과사전과 문제집, 소설 중에서 ‘중학생이 꼭 읽어야 할 한국수필’이라 기억되는 빛바랜 책을 꺼내 들었다. 사실 내가 중2였을 때도 그런 류의 책을 보았던 기억이 있는데도, 책 속의 선정된 글들은 내가 읽었던 그것들과는 달랐었다. 

그저께 늦은 밤, 책장에서 ‘무진기행’을 찾다 책상 밑 구석에 구르고 있던 이 책을 발견하고는 잠시 펼쳐보기로 했다. 분명 내가 알던 그 국어책의 그 수필들이 아니었고, 1989년에 처음 인쇄된 책이었다. 그러니깐 약 20년 전에 선정된 수필들이 실린 책이었다. 종이를 넘기고, 문지르고 하다 책뒷편에 전혜린이라는 이름을 발견하고는 그 글들을 주시했다. 전에 읽은 적 있던 그녀의 수필집 중 일부가 수록되어 있었다. 다시금 그녀의 경험을 읽고, 생각하고, 뮌헨이라는 도시에 대해 상상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내가 알지 못했던 주옥같은 글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 작은 책에 고마운 마음이 생겨났다. 그러면서 마음 한편에는 더러 글쓴이가 얼마나 정성을 들인 글인지 어떤 수필 한 페이지를 다 읽기도 전에 그러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책. 하나의 책은 글쓴이가 스스로를 고통과 인내 속에서 열정, 감성과 이성 등을 쥐어짜내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통과하고 통과하여 자료를 수집하고, 갖가지 경험을 통해 책을 써내는지 그 과정은 직접 겪어본 자 아니고서는 공감하기 꽤 어려울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한다. 

누군가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렇게 그 사람의 머리와 손과 발에 의한 그 창조적 결과물을 아주 싼값에 손쉽게 경험하고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아주 경제적이고, 놀라운 행위다. 물론 책을 통해 얻는 것과 직접 발품 팔아 경험해 얻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책도 읽고, 직접 경험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더욱 풍부하게 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개는 그 수많은 일들을 다 겪어보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우므로 우리는 수많은 경험 가능성 중 일부를 선택하기 마련이다. 선택 외의 것들은 책이나 시각매체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언젠가의 일요일 아침. 지난 밤 라디오를 들으며 개인작업을 한 적이 있었다. 작업은 새벽 4시를 넘어가다 피곤에 지쳐 컴퓨터의 전원을 끄지도 않은 채 잠이 들었었는데, 나는 그만 어느 곳을 여행하고 있었다. 하늘보다 파랗고 깊은 호수에서 일광욕을 하고, 기차를 타고 어느 시골마을 자갈길을 바라보고, 눈처럼 희고 눈부셨지만 따뜻했던 소금사막을 아주 천천히 거닐기도 했었다. 그 곳 주민들과 세계 각지에서 온 젊은 여행자들은 모두 좋은 친구였고, 좋은 대화상대였다.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동경과 두려움이 교차하며 그 미지에 대한 설렘과 갈망을 나는 온전히 가슴으로 경험하고 내 몸 구석구석에 그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그 짧은 경험을 더 지속하고 싶었지만, 그것은 흠칫 구운몽(九雲夢)의 그러한 특성처럼 나는 그것이 소위 일장춘몽임을 옆건물 공사소음에 의해 알아차리고 현실로 다시 돌아왔다.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그 여행에 대해 찾아보니 볼리비아를 다녀온 여행자의 이야기였다. 음성을 통해서만 접한 볼리비아였는데 어찌도 그렇게 선명하게 뇌리에 남은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남자가 소개한 책과 음성을 통해 나는 이미 지난 새벽 그곳을 정말 다녀왔을지도 모르겠다. 

압구정 시네시티 맞은편의 전 회사를 다닐 적에 내 뒤편 대각선의 남자대리는 책을 사다보는 나에게 입버릇처럼 묻곤 했다. 무슨 책 샀는지, 하고 자기는 책 사는 돈이 아까워 책을 살 수가 없다고 매번 말했다. 책을 꼭 사봐야 할 필요 없지 않은가. 도서관에서 빌려봐도 되고, 설사 사서 본다 해도 요즘은 좋은 가격에 다시 되팔 수도 있을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 아예 책을 읽지 않는 그 사람에게 무언가를 경험하기에 가장 편하고 쉬운 방법이 뭔지 물으니 그야말로 여행이지 않겠니 하고 답했다. 

아, 여행이라. 생각만 해도 가슴 설레는 일이니 그 또한 멋지고 좋은 방법이지 않겠나 하고 공감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방법이라는 것은 아무개투어와 같은 패키지여행상품에 의한 것으로 소위 말하는 단체관광상품을 뜻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또한 장단이 있기에 나쁠 것 없지 하고 생각했지만, 겨우 나보다 두 살 많은 미혼남에게서 패기까지는 아니더라도 너무 뻔하고 안정된 삶을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나도 너 나이 때에는 그렇게 생각하고, 계획하고 그렇게 했거든 하고 변명하며 그들은 나를 바라보고, 나는 하늘을 바라봤다.

글 쓰는 자 영원하고, 글 읽는 자 늘 여행하는 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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